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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오늘의 역사 from 위키백과

by 잔잔(lamercalme) 2025. 1. 13.

1월 13일

532년 -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니카 반란이 일어나다.
1847년 - 멕시코-미국 전쟁을 종결하는 카우엥가 조약이 체결되다.
1898년 - 에밀 졸라(사진)가 문학 신문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발표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다.
1988년 - 장징궈 중화민국 총통이 사망하면서 리덩후이 부총통이 차기 총통으로 취임하다.
2012년 - 토스카나 제도의 이솔라델질리오 인근에서 코스타 콘코르디아 침몰 사고가 발생하다.

 

니카반란

니카 반란(Nika Riots)은 532년에 발생한 비잔틴 제국의 대규모 폭동으로,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반란은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 기간 중에 일어났으며,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갈등이 얽혀 있던 사건이었습니다.

1. 배경

니카 반란은 두 주요한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경기장의 분열: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경기장(hippodrome)에서 열리는 전차 경주가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경주팀은 주로 **블루(Blue)**와 그린(Green) 두 파벌로 나뉘었으며, 이들은 단순한 스포츠 팬들이 아니었습니다. 경기장 내에서의 분쟁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으며, 각 파벌은 정치적, 종교적 성향에 따라 서로 대립하곤 했습니다.
  •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에 대한 불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에 대한 불만도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국가 재정과 군사력 강화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과도한 세금과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황제의 권위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귀족과 시민들 사이에서 반감이 커졌습니다.

2. 반란의 발발

니카 반란은 532년 1월 13일 경에 발생했습니다. 당시에 블루와 그린 파벌은 경주에서의 패배와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일종의 연합을 형성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황제의 정책에 항의하며, 경기장에서 모여 "니카(Nika)"(승리하라)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 구호는 반란의 상징적 표현이 되었고, 반란의 규모가 급격히 확산되었습니다.

시민들과 군인들이 함께 모여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를 축출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반란자들은 황제를 물러나게 하고, 새로운 황제를 세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3. 반란의 확산과 황제의 대응

반란은 폭력적으로 확산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시내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반란자들은 황제의 궁전과 주요 정부 건물들을 공격하며, 도시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반란의 성공을 확신하며, 황제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니카 반란의 진압을 위해 군사적 대응을 결정하고, 자신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를 비롯한 군대에 반란을 진압할 명령을 내렸습니다.

4. 진압과 결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반란 진압을 위해 거대한 군을 동원했고, 반란자들은 경기장에서 크게 패배했습니다. 황제는 반란자들의 주요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추방시키는 한편, 시위자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습니다. 반란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처형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란은 약 일주일 만에 진압되었고, 이후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후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제국의 법률과 행정을 강화했습니다.